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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과학혁명의 구조(상)



내가 아는 과학이란 교과서를 통해 배운 과학이 전부이며 그것마저도 어려워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다. 화학, 물리, 지구과학 등이 과학하면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다. 과학의 발전은 동전의 양면, 양날의 검처럼 좋은 점과 함께 그에 대한 문제점들도 꾸준하게 나타났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편해진 것만은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과학의 범위라는 것이 애매하다. 어디까지를 과학이라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다.

자라면서 과학이라는 시간에 배운 것만이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그 범위는 너무 좁고 넓혀가기에는 아직 내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분야가 과학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과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침대는 과학이다” 라는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침대도 분명 과학적인 요소가 많이 결합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주위의 모든 것이 과학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에 들어가 있는 과학혁명은 무엇일까? 혁명이라고 하면 평소에 생각하지 못하던 생각이나 행동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것이 어느 분야가 되었던 혁명이라는 것을 통해 많은 변화가 역사적으로 일어났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혁명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통째로 변화시켰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

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학 혁명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냥 단순히 접근해보면 평소 생각해내지 못했던 기기의 발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하나의 과학 혁명의 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비행기, 자동차 등의 발명은 하나의 혁명처럼 우리의 삶의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 짓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 이름만 보았을 때에는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어떠한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해 서술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를 점검해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혀있던 내 생각의 틀을 깨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교육용으로 얻어진 과학의 개념은 한 국가의 관광안내 책자 격이나 다를 바 없이 실제 활동과는 잘 맞지가 않다. 이 과학혁명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책들에 의해서 오도되어 왔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이 글이 겨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도출하는 것이다.

쿤은 과학사를 다룸에 있어서 기존의 역사 서술의 방식을 벗어나, 바로 그 당대에서의 그 과학의 사적인 온전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현대 과학의 관점과 갈릴레오의 관점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견해와 그의 그룹(스승, 학자, 제자 등)의 견해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더욱이 사가 들은 그 견해들에 최고의 정합성을 주고 또한 자연에의 가장 가까운 일치를 주는 관점에 바탕 하여 그 그룹과 그 비슷한 다른 그룹들의 견해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시적으로 이러한 사적 고찰은 과학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글에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뜻한다. 그중에서 이전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나 융통성을 띠는 성취를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한다. 이 패러다임은 정상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존재하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이유는 ‘패러다임’의 제시가 아닌가 한다.

패러다임의 획득과, 그것이 허용하는 보다 심원한 연구 형태의 획득은 어느 주어진 과학 영역의 발전에 있어서 성숙함의 징조가 된다.

물리광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과학혁명이며,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혁명을 거친 다른 것으로의 연속적 이행은 성숙된 과학에서의 통상적인 발달 양상이다. 그러나 뉴턴의 연구 이전 시대의 특징적인 양상은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러 시대에서 학파들은 모두 개념, 현상, 기법의 전반에 걸쳐 상당한 기여를 했고 뉴턴은 그것들로부터 거의 통일적으로 수용한 물리광학의 패러다임을 최초로 이끌어냈다.

패러다임의 첫 출현 시기에 그것의 전망과 정확도의 양쪽 측면에서 얼마나 크게 제한될 수 있는 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패러다임 전문가들이 시급하다고 느끼는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그 경쟁 상대들보다 더욱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그 지위를 획득한다.

하나의 문제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수긍할만한 증명을 해 낸 과학자가 성공적인 지위를 획득한다는 말이다.

정상과학은 약속의 실제화(actualiz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패러다임이 시사적이라고 제시하는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 그런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키고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시킴으로써 달성된다.

실제로 성숙된 과학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패러다임이 이런 유형의 정리 작업을 얼마나 거치는지를 모르는 형편이며 이러한 활동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점들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무리 작업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들 생애를 통해 종사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것들이 바로 정상과학이라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정상과학의 목적은 현상의 새로운 종류에 대해서 환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현상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며 새로 만들어진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정상과학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정상과학에 의해 탐구되는 영역들은 물론 소단위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활동은 지극히 한정된 범위에 국한된다. 범위는 한정되었지만 패러다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러한 제한들은 과학의 발전에 불가결의 것으로 드러난다. 작은 영역이지만 아주 심오하게 접근함으로써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만든다. 정상과학은 내장된 메커니즘을 지니는데, 그것은 제한을 유도해 낸 패러다임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그 연구를 제한하는 한계성의 완화를 확실하게 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과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연구 문제도 바뀌게 된다.

약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과학이라 하면 방대한 범위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과학에 의해 탐구되는 영역들이 소단위라고 하니 약간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다.

과학자들에게는 소단위이겠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크게 와 닿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소단위라고 못 느끼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겠다.

사실적 과학 탐구에는 세 가지 정상적인 핵심이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항상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패러다임이 사물의 본질에 대해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밝혀진 사실들의 부류가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사실들을 적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그 사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양쪽 다 결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느 시대나 의미 있는 사실적 측정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들을 더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알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실험, 관찰의 과학을 다룬 문헌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는 통상적이지만 첫 번째 것보다는 작은 규모로서 자체로서의 흥미는 대단하지 않지만 패러다임 이론으로부터의 예측들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과학의 실험적인 문제로부터 이론적인 것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면, 과학 이론이 직접 자연과 비교될 수 있는 분야들은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에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영역은 세 가지 밖에 안 된다. 더욱이 적용이 가능한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일치성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이론적 및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이론과 실험의 일치를 증진시키거나 그런 일치가 증명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는 일은 실험학자와 관찰자의 기술과 상상력에 끊임없는 도전을 제기 한다. 일치를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는 정규적인 실험 연구의 제2의 형태이며, 첫 번째 것보다 패러다임에 보다 분명하게 의존한다. 패러다임의 존재는 풀어야 할 문제를 설정해준다. 흔히 패러다임 이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의 고안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는 경우가 많다.

실험과 관찰의 제3 부류는 정상과학의 사실-수집 활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러다임 이론을 명료화하기 위해 수행된 경험적인 연구로 이루어진다. 이때 패러다임 이론의 나머지 모호성의 일부를 해결하고 이전에는 단지 관심을 끄는 것에 그쳤던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제3의 부류는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수학적인 과학에서는 명료화를 겨냥한 실험의 일부는 물리적 상수를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려는 시도들은 보편 상수의 결정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패러다임을 명료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3의 유형의 실험이 존재한다. 이 실험은 다른 연구들에 비해 탐구 작업에 가까우며 자연의 규칙성에서의 정량적 측면보다는 정성적 관점을 많이 다루는 그런 시대와 그 시대의 과학에서 우세하게 작용한다. 어느 한 무리에 대해 전개된 패러다임은 그 밖의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적용에서는 모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관심 영역에 그 패러다임을 응용하는 대안적인 방법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실험을 할 필요가 생긴다.

정규적인 이론 연구의 일부분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긴 하지만 단순히 기존 이론을 이용해서 고유의 가치를 지닌 사실적 정보를 예측하는 일이 된다. 이들 연구들은 채택된 이론을 교묘하게 다루는데 그 속에서 나타나는 예측이 본질적으로 가치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실험을 함으로써 직접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의 목적은 패러다임의 새로운 응용을 제시하기 위해서이거나 이미 이루어졌던 응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연구의 필요성은 이론과 자연 사이의 접촉점을 전개시키는 데 있어 당면하게 되는 난관들로부터 생겨난다. 지상의 문제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론도 쉽게 잘 풀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인 것 같다. 이론과 자연, 현실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연은 이 세상이 끝나도 다 알지 못할 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예측을 하더라도 이변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고 이변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예로써 고도의 발전된 기기로 하루의 기상을 미리 예측해보지만 틀리는 일이 빈번에게 일어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고 살아간다. 틀리면 사람들은 비난을 하지만 또 다시 믿으면서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상과학에서 다른 어느 유형보다도 패러다임 정련의 문제는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험적이다. 연구자들은 사실과 이론 두 가지를 모두 다루고 있었고 연구결과는 단순히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보다 정확한 패러다임을 산출했으며 그것은 연구를 시작했던 원래의 형태가 지닌 모호함을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과학에서 대부분의 연구는 이런 성격을 띠게 된다.

실험적 및 이론적 과학의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대부분 차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에의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라는 3가지 유형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비상한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과학자가 다루는 문제라도 대부분은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의 연구는 다른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을 다루는 일을 중단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러한 패러다임의 폐기는 일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과학혁명을 주도하는 추축이 된다.

패러다임의 폐기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발이라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발로 인해 기존의 패러다임의 폐기가 되는 것인지 기존의 패러다임의 폐기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발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규적인 연구 문제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그들 연구가 개념적이거나 현상적인 주요한 새로움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 가능한 결과들의 범위는 상상이 허용하는 범위에 비하면 언제나 좁다. 그리고 결과가 그런 좁은 범위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프로젝트는 대게 연구의 실패가 되는데 그런 실패는 과학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과학자에게 정규적인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패러다임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답은 과학자들의 정상적 연구의 문제들에 대해 드러내는 열성과 헌신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단지 거기서 얻게 될 정보의 중요성 때문에 몇 해를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람은 없다. 기존의 기기로 측정하는 것에 의해 얻어지는 데이터도 충분히 그 가치와 의미가 있긴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러한 활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예전부터 줄곧 수행되었던 과정의 반복들이 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부 반응이 정규적 연구 문제의 매혹에 이르는 단서를 제공한다. 정규의 연구 문제를 결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예측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며 이것은 복합적인 기기적·개념적·수학적 수수께끼의 풀이를 요구한다. 이것을 해내는 사람은 수수께끼 풀이의 선수로 밝혀지며 수수께끼의 도전은 과학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하게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수께끼는 여기에서 적용한 표준적 의미로 풀이에서의 탁월성이나 풀이 기술을 시험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의 특이한 범주를 말한다. 수수께끼의 결과가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이냐 또는 중요하냐 하는 것은 수수께끼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대조적으로 참으로 급박한 문제들이 우위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유는 그런 문제들은 그 어떤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질적 가치는 결코 수수께끼에 대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확실히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한계 기준이 된다.

과학자들의 사회가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획득하는 것들 중 하나는 패러다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동안 풀이를 가진 것으로 가정될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문제들은 대부분 그 과학자 사회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참여하라고 권장하게 될 유일한 문제들이 된다. 예전에는 표준으로 되어 있었던 다수를 비롯해 다른 문제들이 탁상공론이라거나 다른 분야의 관심사라는 등의 이유로 인해 거부당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의 패러다임은 과학자 사회를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수께끼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 격리시키기 까지 한다. 정상과학이 이렇게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전문가들이 그들 자신의 독창성의 결핍만이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문제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상과학의 문제들이 이러한 의미로 인하여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과학자들이 왜 그런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하는가의 이유를 물을 필요성이 사라진다. 인간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용성에의 욕구, 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는 경이감, 질서를 찾아내려는 희망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동기들은 사람이 다루어야 할 특수 문제들을 결정짓는데 도움을 준다. 경우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동기들이 과학자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그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수수께끼와 정상과학의 문제들 사이의 유사 관계를 살펴볼 때 만일 수수께끼로서 분류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문제는 그 해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 이상의 특성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해답의 본질과 그것들이 얻어지는 단계를 한정짓는 규칙도 존재해야 한다. 용납될 만한 풀이들은 이론적인 문제들에 이와 비슷한 종류의 제한 조건으로 얽매이게 된다.

수수께끼와 규칙들에 관한 논의는 정상과학에서 실제 활동의 본질을 밝혀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여러 가지 오류를 빚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주어진 시대에서 거기에 집착하는 규칙들을 지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규칙 자체만으로 전문가들의 활동에서 공유되는 모든 것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어느 시대의 하나의 전문 분야를 면밀히 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양한 이론들의 개념적, 관찰적, 그리고 기기적인 응용에서의 그들 이론의 되풀이되는 설명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교재, 강의와 실험에 구현된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들이다. 이것들을 고찰하고 과학 활동에 임함으로써 해당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일을 배우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성숙된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은 비교적 수월하게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유된 패러다임의 결정이 공유된 규칙의 결정은 아니다. 그 것은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칠 때 과학자는 그 사회의 패러다임끼리도 서로 비교하며 당대 연구 보고서들과도 비교해야 한다. 이 목적은 일반적인 패러다임으로부터 명시적으로 분리 가능한 어떤 요소들을 추상해내어 그들 연구의 규칙으로서 전개시켰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연구 전통의 일관성을 규칙에 의해 이해하려고 한다면 해당되는 분야에서의 공통 근거에 대한 어떤 명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규 연구의 전통을 이룰 자격이 있는 규칙들의 본체를 찾는 것은 지속적이고도 심각한 좌절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을 깨닫게 함으로써 좌절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진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완벽한 해석 또는 합리화에 동의하지 않아도 패러다임의 확인에서는 의견의 합의를 볼 수 있다. 표준 해석의 부재가 패러다임이 연구의 방향을 잡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관련되는 과학자 사회가 이미 성취된 특정 문제-풀이를 의문 없이 수용하는 한에서만 정상과학은 규칙 없이도 진행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나 모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경우에는 규칙들이 중요하게 될 것이며, 규칙들에 대한 특유의 무관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패러다임의 우선성이라고 한다.

패러다임은 광범위한 과학자 집단에 공통적일 필요는 없다. 전공의 세분화 과정에서 상당히 차이나는 패러다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새롭고 예기치 않은 현상의 발견조차도 혁명적인 발견이 될 수 있다. 동일한 것에 대해서도 자신들 특유의 연구 훈련과 활동을 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국소적인 전문분야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의 차이이나, 어느 쪽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정상과학은 과학지식의 범위와 정확성의 꾸준한 확장이라는 목표에서 크게 성공적인 고도의 집적된 활동이다. 모든 관점에서 정상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에 정확하게 잘 맞는다. 정상과학은 사실이나 이론의 새로움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적인 경우 그 어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현상들이 과학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과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이론들이 계속 창안되어 왔다.

발견과 창안 사이의 차이, 또는 사실과 이론 사이의 차이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이다. 발견은 이상 현상의 지각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자연이 정상과학을 다스리는 패러다임-유도의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다음 단계로 이상 현상의 범위를 확장시켜 탐사하는 것과 더불어 지속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상이 기대치가 되도록 패러다임 이론이 조정되는 경우에만 종결된다.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동화시키는 것은 이론의 추가적 조정 이상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그 조정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새로운 사실은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

하나의 해답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찾고 있는 종류의 대답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발견의 본질을 밝혀줄 것이다. 발견이란 거기에 대해 적절하게 질문이 제기되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그런 물음을 묻게 된다는 사실은 발견에 매우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과학의 이미지에서 조금은 빗나간 증상이 된다.

관찰과 개념화, 사실과 이론에의 동화, 이 두 가지가 발견 과정에 밀접하게 얽혀 있다면 발견은 하나의 진행 과정이며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 관련되는 개념적 범주가 미리 갖추어진 경우, 즉 현상이 새로운 유형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함께 즉각적으로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은유로서 심리학의 실험은 과학적 발견의 과정에 대해 신기할 만큼 단순하고 수긍이 되는 설명을 제공한다. 후에는 이상 현상이 관찰되도록 마련된 상황일지라도, 초기에는 예상되고 통상적인 것만이 경험된다. 그러나 더 깊게 인식하게 되면 무언가 잘못이란 것을 깨닫게 되거나 또는 이전에는 잘못되었던 그 무엇에 그 결과를 연관시키기에 이른다. 이상의 이러한 인지는 개념적 범주가 조정되는 시기의 막을 열게 되며, 결국 처음에는 이상하던 것이 결과적으로 예측되는 것으로 바뀌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발견은 완료된다. 이러한 과정은 과학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이 출현하는 경우라면 어디에나 내포되어 있다. 그 과정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정상과학이 새로움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억제하는 경향을 띤 탐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렇게 효과적인 탐구인지를 보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과학의 발달에서나 최초로 수용된 패러다임은 보통 그 과학의 종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관찰과 실험의 대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듯이 느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야의 과학이 더욱 발달함에 따라 정교한 장치의 제작, 심오한 의미의 어휘와 기술의 개발, 그리고 상식에 대한 일치성이 점점 감소되는 개념들의 정련이 요구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전문화는 과학자의 시야를 제한시키며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상당한 저항으로 작용하며 과학은 점점 경직되어 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이 그룹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분야에서는 정상과학은 정보의 세부화를 유도한다. 다른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관찰-이론 일치의 정확성으로 유도한다. 이런 상세함과 일치의 정확성은 대단히 높지는 않은 그들의 본연의 관심을 능가하는 가치를 가진다. 예측되는 기능을 위주로 제작된 특수 장치가 없었다면 궁극적으로 새로움으로 이끈 결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장치가 갖추어져있더라도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은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배경에서만 나타난다. 패러다임이 정확하고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이상 현상에 대하여 패러다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예민한 지표를 제공한다. 과학에서의 유의미한 새로운 발견이 흔히 여러 실험실에서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은, 정상과학의 강렬한 전통적 성격과 그런 관례적 탐구로 그 자체의 변화에의 길을 마련하는 온전성 모두에 대한 지표가 된다.

정상과학이 새로움을 지향하지 않는 다는 말이 이해가 잘 가지는 않는다.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뉴스를 살펴보면 새로운 발견, 새로운 발명에 관한 뉴스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과정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발견된다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아니면 과학자에게는 새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새로운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더 이상 한 패러다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없거나, 혹은 중대한 문제가 그 패러다임으로 풀리지 않을 때 그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게 된다. 어느 이론에 있어서 수정안이 무성하게 되는 것은 위기 상태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살펴본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 변화의 원인 또는 기여 요소였다. 그 발견들이 암묵적으로 그 속에 내포되었던 변화들은 모두 건설적이며 파괴적이기도 했다. 발견이 동화된 이후, 과학자들은 보다 넓은 영역에 관해 설명할 수 있었고 이미 알려진 현상들에 관해서는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득은 기존의 표준 이념이나 방법을 포기하거나 동시에 이전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들을 다른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성취되었다. 이런 유형의 변천은 정상과학을 통해 성취된 모든 발견과 연관된다. 단 하나의 예외는 세부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측되었던 놀라울 것 없는 발견들이다. 그러나 발견이 그러한 파괴적-건설적 패러다임 변화의 유일한 원천인 것은 아니다.

이상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 출현하는데 한 몫을 한다면 그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심오한 인식이 수긍할 만한 이론의 변화 모두에 선수 조건이라는 것은 딱히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재론의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과학자들은 주어진 자료의 수집에 의해 언제나 하나 이상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음을 꾸준히 증명해 왔다. 과학의 역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초기 전개과정에서는 그러한 대안들을 고안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의 창안은 과학의 발전에서의 패러다임-이전의 단계를 제외하고는 과학자들이 거의 수행하지 않은 작업이다. 그 뒤에 따라오는 진전 과정에서 지극히 특수한 경우에서만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위기들의 의미는 도구를 바꾸어야 할 계제에 도달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도구들이 패러다임이 정의하는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증명되는 한 과학은 빠른 속도로 활동하며 그들 도구들을 확신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가장 심도 있게 침투한다.

그 이유는 생산 활동에서처럼 과학의 연장을 새로 만드는 일도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를 위해 준비되는 일종의 호사스러움이다. 위기들의 의미는 도구를 바꾸어야 할 계제에 도달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위기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있어 필수적 선행 조건이라 가정하고 과학자들이 위기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대답의 일부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분명한 것으로서 과학자들이 심각하고 만연된 이상 현상에 부닥쳤을 때 결코 취하지 않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주목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신념을 잃고 다른 대안을 궁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패러다임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지위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없는 것이 된다. 지금껏 과학 발전에 관한 사적 고찰에 의해 드러난 과정은 그 어느 것도 자연과의 직접 비교에 의해 허위 증명을 하는 방법론적 틀을 닮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과학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과학자들이 이론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경험과 실험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과학자로 하여금 기존의 수용된 이론을 거부하도록 이끄는 판단의 행위가 항상 그 이론과 세계와의 비교 이상의 것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며 그 결정으로 이끌어가는 판단은 패러다임과 자연의 비교 그리고 패러다임끼리의 비교를 포함한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명료화를 궁리하고 분명히 드러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이론을 이모저모로 수정할 것이다. 관련되는 수정과 자격의 다수는 이미 기존의 문헌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인식론적 반증이 사소한 자극 이상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그 까닭은 더 이상 말썽거리가 아닌 범위 내에서 과학의 새롭고 색다른 분석이 출현하도록 그 반증들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과학혁명에서 나중에 관찰하게 될 전형적 양상이 여기에 적용된다면 이들 이상 현상들은 더 이상 단순히 사실로서만 보이지 않는다.

이상 현상이나 반증에 직면하게 될 때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일반화에 대해서 실제로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고, 여전히 과학자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에 남길 리는 거의 없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위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과학을 포기하고 마는 일도 있었다. 창의적인 과학자들은 뒤죽박죽된 세계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하는 경우가 수시로 존재한다. 그러나 과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은 반증 사실들 그 자체가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패러다임 폐기이다.

이것을 통해 자연을 해석하게 될 최초의 패러다임이 발견되면 아무런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는 연구란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것을 대치하지 않은 채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파기하는 것은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반증 사례들이 부재하는 연구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정상과학이 반증에 부닥치지 않기 때문임은 아니다. 정상과학을 구성하는 수수께끼라고 불렀던 것은 과학 연구의 기틀이 되는 어느 패러다임도 그 문제들을 완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극소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연구 문제들의 산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전적으로 기기에 의존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정상과학이 수수께끼라고 보는 문제는 어느 것이든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반증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위기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위기의 존재자체가 수수께끼를 반증으로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여기에 선명한 분리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패러다임의 수정안이 분분해짐에 따라 위기는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허용하게 되는 방식이 된다. 저자는 이에 관해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어떠한 과학이론도 반증에 맞닥뜨리지 않거나, 그런 과학 이론들 모두가 언제나 반증들에 직면하는 것이다.

정상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최대한 일치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들은 확증 또는 반증에 대한 시험이나 조사로 쉽게 알 수 있다. 정상과학의 목적은 패러다임의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다. 해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의 탓이지 과학 이론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과학 교수법이 어느 이론과 그 실례 적용에 관한 내용을 얽히게 하는 방식은 다른 자료로부터 끌어낸 확인-이론을 강화시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럴 이유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면 과학 교과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적용들을 이론에 대한 증거로 쉽게 받아들인다.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가의 이유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을 수용한다. 교과서에 실린 예들은 증거로서 실린 것이 아니라 현재 활동의 기초에서 패러다임을 익히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들이 실린 것이다.

와 닿는 문구가 있었다.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을 수용한다는 문구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권위 때문에 그들의 말, 이론에 문제를 제기 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버린다. 그러다보니 발전이 더디고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나 명성이 허투루 쌓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이름과 명성이 그 문제의 정답을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자는 이론과 자연 사이의 일치에서 이상을 인지하게 될 때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아무리 많은 차이가 나더라도 반응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어느 정도는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많은 차이가 나더라도 결국은 정상 연구의 실제에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소한 실수도 없을 것 같은 경우에서도 인지된 이상 현상이 반드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시 의문이다. 과학자는 이론과 자연 사이에서 이상을 인지하게 되면 왜 그런 이상 현상이 발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과학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상식의 선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다보면 그것은 이상이 아닌 하나의 일상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이상 현상이 위기를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보통의 변칙 이상의 것이라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과 자연의 일치에는 항상 난관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예상치 못한 과정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잡혀간다. 일일이 발생하는 이상 현상들을 검토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는 과학자라면 일다운 일을 해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상 현상을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는 완벽하게 일반성을 지니는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 현상을 긴급한 문제로 만드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보통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나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또 다른 수수께끼 이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비상과학으로의 전이는 시작된다. 이상 현상 그 자체가 전문분야에 의해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그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자들이 그 현상에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대게는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함에 따라 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연구자들이 그 분야를 제1의 주제로 삼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분야는 이전의 것과 같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다른 양상으로 보이는 것은 과학적 탐색에서의 새로운 정착점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초기에는 매우 긴밀한 패러다임 규칙을 따를 것이나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점차 사소한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성공적일 것이나 제각기 서로 달라서 패러다임으로 수용될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기가 힘들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갈래의 명료화를 거치면서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진적으로 모호해진다.

새로운 이론의 출현은 과학 활동에서 어떠한 전통과의 관계를 깨고 전혀 다른 규칙 하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전통을 도입한다는 이유로 인해 위기는 최초의 전통이 어긋나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 한해서 일어날 수 있다.

이론에서의 뚜렷한 근본적 이상 현상에 부닥치게 되면 과학자는 그것을 보다 정확하게 분리시켜 그것에 구조를 부여하고자 시도한다. 이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들이 적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정상과학의 규칙들을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과학자는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실험들에서 드러난 것보다 더욱 극적이고 시사적인 위기로 만드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과학자는 아무것이나 무작위로 추구하며, 단지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하며 본질을 제대로 추론할 수 없는 결과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비춰질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실험도 이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므로 위기에 처한 과학자는 끊임없이 추론적인 가설들을 내세우려고 애쓰게 된다. 이것이 성공적인 경우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이를 수 있고 아닌 경우는 포기하는 경우에 이를 것이다.

 

8장까지 책을 읽었지만 확실히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초반부에 서술했지만 내가 알던 과학은 한 국가의 관광책자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활동과는 다른 점도 존재했다.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확실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렵다. 인터넷에서의 정의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라고 적혀 있었다(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찾으니 더욱 헷갈렸다. 이데올로기와 패러다임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행동 , 사고 등을 규정하는 하나의 틀” 정도로의 이해를 했다.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학자들은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규칙을 찾고자 했으며 그러한 규칙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것이 성공을 한다면 또 하나의 패러다임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라 불리던 것이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학자들은 다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하게 되고 이것이 또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혁명을 보면서 대단히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처럼 여기게 되지만 과학자들의 목표는 이것에 있지 않다. 사실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려하지도 않고 만들어진 이론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으며 패러다임이 제공한 현상을 명료화하려고 한다고 했다.

내 나름의 정리를 한다면 패러다임은 사상이나 가치관 등을 다양하게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혁명은 새로운 발견으로 생겨난 패러다임이 기존의 질서에서 지배적이던 정상과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은 사상이 뿌리박히는 것을 정상과학이라고 한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예를 들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천동설(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것이 유럽 중세까지 유럽 사람들에게는 ‘정상과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하여 지동설(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천동설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결국 지동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상과학’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지동설은 아직까지도 ‘정상과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이 얽혀있는 실타래처럼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책을 읽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과학과 내가 알고 있던 과학의 개념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정리자체가 쉽지가 않다. 나는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면 존재하지 않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나타나 우리의 삶의 패턴을 바꾼다고 생각했다. 또한 과학의 범위를 상당히 좁게 생각해왔었다. 내가 알던 과학의 개념이 좁은 의미의 개념이었다는 것은 알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과학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기는 아직은 부족함이 많이 있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연을 모두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들은 자연이든 과학이든 그 분야에 맞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자 혹은 찾고자 하였고 한때는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불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며 언제든지 그 틀은 깨질 수가 있고 새로운 틀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 같다. 설명할 수 있는 틀 혹은 구조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틀이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분명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사고를 규정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틀, 구조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들 찾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아직 책의 반 정도 밖에 읽지는 않았지만 나의 지식이 좀 더 방대해지고 똑똑해졌을 때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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