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정신세계가 잘 반영된 소설입니다. 극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인간 사회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은 멋진 신세계이지만 실상 내용은 그와 다른 반어적인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감독 올더스 헉슬리는 영국에서 태어나 1963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1894년 출생한 헉슬리는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원래는 의학도를 지망했으나, 이튼학교 시절에 거의 실명에 가까운 안질에 걸려 영문학을 택했다고 합니다. 저명한 문예비평가 매슈 아놀드가 그의 외가쪽 사람일정도로, 그는 지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소설가가 된 계기는 소설 ‘크롬 옐로’ 출간 때 이 소설을 읽은 T.S. 엘리어트가 그에게 소설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보는 이에 따라 다릅니다. ‘어릿광대의 춤’으로 보는 이도 있고 ‘연애대위법’을 보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널리 알린 책은 1932년 작 ‘멋진 신세계’ 였습니다. 소설이 발표된 1932년 무렵은 전체주의적인 이념이 고개를 들던 시기입니다. 또 인간의 정신보다 물질을 중시한 사회학의 마르크스 등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장밋빛 미래사회를 꿈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 줄거리를 보자면 소설은 포드기원 632년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인공 수정된 후 유리병 속에서 배양 되고 사회적 수요에 따라 알파,베타 등 계급이 정해지고 그에 합당한 지적능력과 신체적 조건을 갖추도록 화학적 처리를 받고 태어난다. 그러나 버나드 막스는 알파 플러스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배양과정의 실수로 열등한 육체로 태어났다. 자기연민과 고독에 시달리던 버나드는 책을 읽거나 시를 쓰면 부도덕 하게 취급받는 사회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헬름홀츠 윗슨과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 야만인 보호구역에 들어 갈 수 있는 허가를 받은 버나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레니나 크라운과 동행한다. 그곳에서 그는, 원래 베타 마이너스 출신이었으나 이 구역을 여행하던 중 사고를 당해 버려진 린다와 그녀의 아들인 존을 만난다. 존은 ‘인공부화소’ 소장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마침 평소에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소장이 자신을 아이슬란드로 전출시킬 것을 검토한다는 정보를 접한 버나드는 총통의 허가를 받고 존과 린다를 런던으로 데리고 온다. 의학의 힘으로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다가 60세가 지나면 갑자기 죽게 되는 이 사회에서 40대에 이미 늙고 뚱뚱해진 린다는 괴물 취급을 받지만, 존은 모든 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란 단어가 외설이 되는 이 사회에서 존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진 소장은 자취를 감추고, 존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버나드는 유명인사가 된다. 한편 존은 자신의 어머니인 린다가 항상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세계가 사실은 욕망에 있어서 어린애와 같은 백치의 사회이며, 이들의 자유,고통,셰익스피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자신이 흠모한 레니나가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다. 소마를 복용하다 사망한 어머니 린다로 인해 존은 소마 배급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그와 친분을 나누던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섬으로 보내진다. 총통에게 청원하여 존은 산꼭대기의 낡은 등대에서 은둔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구경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와 끊임없이 괴롭히고, 존은 결국 자살한다.
버나드는 운좋게도 베타계급으로 결정되어 초록색 옷을 입고 성장한 인물입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잠잘 때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카키색 옷의 델타계급 아이들과는 놀기 싫어. 싫어. 앱실론 계급의 아이들은 더 엉망이야. 그 애들은 검은 옷을 입어요, 바보예요. 난 베타계급이라서 너무 행복해...' 등등의 말을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수십년간 수면교육을 통해 각 계급별로 자기 운명과 임무에 적합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란 우리들에게 '가족'이란 개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어머니'며 '임신'이며 '일부일처제' 같은 말은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수면시 교육을 통해 수만번 들은 대로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다'. 만일 내가 4개월째 한 남자만 만난다면 바로 환자 취급받을 것이다..나는 매번 다른 상대와 만나 실감나는 '촉감영화'를 보고 헬리콥터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데이트를 한다. 여성의 30%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불임처리돼 태어나므로 임신 걱정도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50대에도 20대처럼 탱탱한 피부를 지니다 아무렇지 않게 죽는다. 수면시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죽음을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쾌감이나 두려움, 열등감, 고통 등을 느낄 때에는 '소마'라고 불리우는 부작용없고 합법적인 마약성분의 알약 몇 알을 먹으면 완전히 해소됩니다.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걱정도 구속도 없이 완벽한 유희 속에서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행복 아니던가?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니던가?
이것이 바로 헉슬리가 내다본 500년 뒤의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유토피아에도 없는 것이 있다. 예술, 과학, 종교가 그러하다. 소마 몇 알이면 두려움이 해소되는데 교회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없다. 사람들이 '자유'며 '사랑' 같은 개념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그것들을 노래하는 예술이 있다 한들 이해될 리가 없다.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한다. 순수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발명은 그래서 위험하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식료품을 인공합성으로 제조할 수 있는 상태에서 과학을 발전시킬 필요도 없다. 이처럼 헉슬리는 예술과 과학과 종교는 인간의 행복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500년뒤의 인류가 보기엔 지금 우리의 삶이 몹시도 한심하고 낙후된 것일 게다. 우리가 지금 조선시대에 대해 느끼는 것보다 더 미개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헉슬리도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날 우연히 출현한 '야만인'을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신기하게 보더니 나중엔 구역질하고 돌을 던진다. '야만인'은 사실 지금의 우리 인류다. 도둑놈 주제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알래스카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야만인'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개념이다. 아무튼 결국에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마는 이 야만인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당하는 기분이 들어 좀 섬칫하다.
'멋진 신세계'란 이른바 반어법이다. 헉슬리는 당시 미래 사회를 비관적으로 봤고 이를 풍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년에 신비사상에 몰입하여 종교적 도덕주의자로 변신하는 바람에 십여년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지금 이 작품을 다시 쓴다면 야만족 주변에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다.
미래를 그린 소설들은 이렇듯 대개 비관적이다. 또 나에겐 그렇게 크게 재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흥미가 없다.그래서 내가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멋진 신세계>와 같은 사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이런 식의 태어나기전부터 결정지어진 운명과 병 속 삶이 매우 비인간적이고 불행한 것이라고 여겼다. 진화의 끝은 결국 인간성 파괴에 이르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요즘 나는 '비인간적'이란 게 뭔가 의심스럽다.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야만인'이 오히려 비인간적인 것이잖은가. 야만인은 똑같은 얼굴로 조건반사적으로 단련된 하층계급들을 보면서, 비인간적이라며 혐오스러워 하고 일어나 싸우라며 선동하지만 이 역시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상대적인 감정이다.
상층계급이 선민의식을 갖고 하층계급을 무시하도록 키워지는 것이나, 하층계급이 무식하고 비굴하게 행동하도록 키워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다음 생각을 펼칠만큼 철학적인 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 다만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가 몇가지 부분은 나쁘지만 전반적으로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한 개인의 목표가 되고 불행의 씨앗이 되는 이 시대보다는, '가족'과 같은 제도로 울고웃고 구속받으며 사는 이 시대보다는,잘 할 수 있는 분야와 잘 하고 싶은 분야가 딱 들어 맞지 않아 정력을 낭비하는 이 시대보다는,여러모로 그 시대가 더 진보되고 행복 할 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과학의 힘으로 무뚝뚝하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삶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어져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삶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인류에게는 무소유도 아닌 '공유'의 실현이야말로 가장 필요하고 실현가능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요즘엔 미래를 표현하는 영화들도 많다. 보면서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 역시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시대가 지나고 지나서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야지만 가능한 일들을 많이 담고 있다. 미디어들의 발달 그리고 새로 출현하는 뉴미디어들... 기계의 힘을 엄청나게 받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적인 미가 많이 없다. 아예 없는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과는 많이 다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사랑이 없고 부모님이 없고 모든 것들을 과학이 발달된 기계에 의존하는 이런 삶은 너무 딱딱하다. 사랑을 하고 정을 나누며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고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며 기계적인 힘도 필요하겠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면서 더욱 정을 쌓는, 옛날 말로 하자면 두례 정도가 알맞을 것 같기도 한 이런 삶을 나는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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